★Who is rain★/ビ - Story

[공홈]2002.08.22 비의 이야기(1)

거루천사~♥ 2017. 8. 25. 11:29

1. 나의 어린시절


아직도 난 내가 가수라는 게 신기하다. 가끔 CD 정리를 하다가 내 CD를 발견하면 뿌듯해진다. 내가 가수가 되려고 꿈을 키우면서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의 춤과 노래를 따라 했듯 지금 어느 곳에선가 나의 노래를 듣고 또 내 춤을 따라 추면서 가수의 꿈을 키울 사람이 있다는 게 정말 행복하게 느껴진다.
난 어릴 적 서울 홍익대 앞에서 살았다. 엄마는 재작년에 돌아가셨고, 지금은 아빠와 여동생 등 세 사람이 함께 산다. 세 살 어린 내 여동생은(난 82년 생이고, 본명은 정지훈이다) 워낙 성격이 무뚝뚝해 나랑 그렇게 친하게 지내지는 못한다. 둘 다 말이 없는 편이라 하루 종일 서로 한 두 마디를 건넬까 말까다.
어렸을 때 난 아무도 모르게 집 나가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어렴풋이 기억 나는 한 가지 사건. 4살 때 가출 사건이다. 엄마 아빠가 같이 일을 하고 돌아오셨는데 내가 집에 없더란다. 그래서 실종신고를 냈고 나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정신없이 돌아다녔지만 날 찾기 못했다.
그렇게 하루가 흘러 전화가 걸려왔다. 강화도에서 나를 발견했다는 전화였다. 우리 집 앞에 버스 터미널이 있었는데 아마도 내가 거기서 버스를 타고 갔던 것 같다. 강화도에선 내 팔에 달려있던 팔찌의 연락처를 보고 집으로 전화를 해 줬다. 기억이 또렷하진 않지만, 어떤 아줌마가 버스에 올라 타려는 나를 도와줬던 기억은 어렴풋이 난다.


2. 원래부터 내성적이던 내 성격


어릴 적에도 난 지금처럼 내성적이고 말이 없었다. 지금도 사람들과 친해지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래도 한 번 친해지고 나면 ‘이렇게 말을 잘하는구나’ 하고 놀랄 만큼 얘길 많이 한다.
초등학교 때 공부엔 별로 소질이 없었고 하루 종일 말도 않고 지냈다. 그러니 당연히 날 좋아하는 여자 친구도 없었다. 그냥 반에 있는지 없는지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였다. 조금 튀었다면 그저 키가 컸다는 것 정도. 난 늘 뒤에서 서너 번 째에 서는 키였다.
조용하게 앉아만 있던 내가 어느 날 사건을 터뜨렸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갔던 수학여행의 반 대항 장기자랑 시간이었다. 우리 반 순서가 점점 다가오는데 아무도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계속 지켜 보던 난 답답한 생각이 들어 내가 나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반 친구들의 반응이 무척 기분 나빴다. ‘왜 쟤가 나가냐’며 날 헐뜯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게 아닌가. 난 오기가 났고, 드디어 우리 반 순서가 됐다. 나는 무대 위에 섰다. 아이들은 나에게 집중했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난 ‘뭔가를 꼭 보여주겠다’고 다짐을 하며 TV에서, 길거리에서 본 춤을 흉내내며 정신 없이 췄다.
내 무대가 끝나자 아이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 난 처음으로 벅차 오르는 감격을 느꼈고, 그 때 문득 내 머리에 생각이 스쳤다. ‘그래 춤이다’ 라고 말이다.


3. 나쁜짓은 않겠다고 아버지와 맹세


춤을 배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무서운 형들과 어울렸지만, 아버지와 약속했다. 절대 담배 피우지 않고 나쁜 행동을 하지 않기로 말이다. 난 담배 피우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우리 댄싱팀은 열심히 연습했고, 실력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서울 잠실 롯데월드에서 열렸던 전국 아마추어 댄스 경연대회에 나갔다. 정확히 몇 년도인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개그맨 표인봉 형이 진행을 맡았다. 우리 댄싱팀의 이름은 ‘챌린저’. 난 네 명의 형들과 출전했고, 키가 커서 가운데에 서서 춤을 췄다. 하지만 상은 못 탔다.
나중에 가수가 되고 나서 인봉이 형한테 들었는데, 내가 나갔던 그 대회에 가수 강타형도 나왔다고 한다.
중학교 2학년 때는 럭비에도 관심이 있었다. 럭비부 형들의 모습이 멋져보여서 옆 학교의 럭비부 훈련에 끼어서 연습을 했는데, 춤과 운동 둘 다 잘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춤을 택했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이 돼 진로 선택의 고민에 빠졌다. 친구들은 별 고민 없이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난 춤도 추고 공부도 할 수 있는 학교를 찾았다. 그래서 결정한 곳이 예술고등학교 였다.
난 연기 학원에 다니지 않고 그냥 집에서 드라마를 보면서 대사를 메모해 뒀다가 혼자 외우면서 연습 했다.


4. 안양예고에 당당히 합격하고..


연기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던 난 안양예술고등학교 입시를 앞두고 서점에 가서 관련 책을 모조리 사서 읽었다. 연기 외에 다른 특기도 보여줘야 했는데, 춤과 관련된 것을 찾다가 마임을 준비했다. 몸으로 표현하는 것에는 자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은 ‘네가 무슨 연기냐’며 반대했지만, 난 열심히 했고 당당히 합격했다.
그런데 재밌게 보이던 연기가 공부로 생각하고 배우니 나와 잘 맞지 않았다. 그래서 1학년 때 연기는 대강하고, 대신 형들하고 어울려 다니며 계속 춤을 췄다.
춤 실력이 학교에 알려지면서 각종 장기자랑 무대에 대표로 나가게 됐고 여학생들의 시선이 내게도 쏠렸다. 아침마다 학교에 가서 내 사물함을 열어 놓으면 누가 갖다 놓았는지 모를 선물들이 쌓여 있었다. 우유 빵 꽃 편지 등이었다.
요즘엔 가끔 ‘그 때 누군지 찾아 봤어야 했는데’라는 후회가 들지만 당시엔 춤추느라 정신 없어서 여자한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1학년 땐 연기에 적응해 보려고 어느 정도 노력했는데, 2학년 초반이 돼선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연기 수업이 듣기 싫어졌다. 그래서 지각을 밥 먹듯이 했고, 아침 조회 시간에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연기 실습 시간엔 선생님 모르게 ‘땡땡이’를 쳤다.
그렇게 자꾸 춤에만 빠지면서 난 학교 선배들에게 안 좋게 ‘찍혀’ 버렸다.


5. 진영이형과의 운명적인 만남


2000년 내 일생에 가장 큰 두 가지 사건이 벌어졌다. 날 가수로 이끌어준 (박)진영 형을 만났고, 사랑하는 어머니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냈다.
우선 진영 형과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 하겠다. 난 고등학교 3학년 때 춤을 추는 언더팀에 들어갔다. 형들과 함께 생활하며 설거지와 밥도 하면서 공연 했고, 당시 ‘잘 나가던’ 서울 이태원과 홍대 앞의 클럽에서도 춤 췄다.
당시 집안 사정이 너무 안 좋았다. 장사 하시던 아버지는 실패를 거듭하시다가 가족들에게 “자리 잡으면 다시 돌아오겠다”는 편지 한 장을 남기시고 브라질로 떠나셨다.
그래서 당뇨병을 앓고 있던 어머니가 아버지 대신 생계를 이어가셔야 했다. 난 몸이 그렇게 아프면서도 장사를 하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엔 내가 정말 어리고 생각이 깊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께 불만을 갖게 되면서 춤 추는데 더욱 빠져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매니저를 하던 형을 따라 한 허름한 사무실에 갔다. 그런데 그 곳에 박진영 형이 걸어 들어 오는 게 아닌가. 그곳은 진영 형의 JYP엔터테인먼트 사무실이었다.
진영 형은 나를 보더니 “혹시 뭐 하는 분이세요?”라고 물어 왔다. 난 “전 춤추는 사람인데요”라고 답했고, 진영 형은 “오디션을 할 수 있게 비디오 테이프를 보내 달라”고 말했다.
god 박지윤을 키워낸 프로듀서 박진영이 날 가수로 키우려나?’ 순간 너무나 기뻤고 난 당장 돌아가서 오디션 용 테이프를 형에게 보냈다.


6. 어머니의 입원비까지 책임진 진영이 형


오디션 테이프를 보낸 뒤 (박)진영이 형에게서 연락이 왔다. “음반을 내보자”며 날 형의 제자로 받아 줬다. 난 정말 기뻤고, 더 열심히 춤을 추고 노래 연습을 했다.
이렇게 내가 기쁨에 젖어 가수의 꿈을 키워 가는 사이 어머니의 병세는 더욱 악화됐다. 브라질로 훌쩍 떠났던 아버지는 몇 달 후 그곳에서도 적응하지 못한 채 돌아오셨다. 아버지 대신 가장 역할을 했던 어머니의 건강은 갑자기 악화됐고, 난 솔직히 엄마가 어릴 적부터 자주 아팠기 때문에 당시엔 그렇게 심각한 상황인 줄 몰랐다.
아버지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지방으로 떠돌았고, 어머니를 보살필 사람도 없었다. 나 역시 ‘나 혼자라도 열심히 살아야지’란 생각을 하며 어머니를 잘 챙기지 못했다.
난 진영이 형에게 엄마의 상황에 대해서 다 얘길 했다. 그랬더니 형은 “내가 어머니를 입원 시켜 드리고 병원비도 낼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날 위로 했다. 정말 감사한 분이다.
이후 어머니는 입원을 했다. 그런데 이미 때는 많이 늦었다. 어머니가 입원했을 당시 이미 염증이 심했고 온 몸이 곪아 있었다. 병원에서도 그냥 퇴원 하는 게 낫겠다는 말을 했다.
어머니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고, 그 당시를 생각하면 난 정말 가슴에 한이 맺힌다.
엄마의 상태는 계속 안 좋아졌고, 다시 입원했다. 어머니가 입원했을 당시 진영이 형 아버님과 형수님(진영이 형의 아내)도 와서 우리 엄마의 곁을 지켜주셨다.


7. 외로운 연습장 대신 지하철, 버스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지만 엄만 혼수상태에 빠지셨고, 그렇게 저 세상으로 가셨다.
어머니는 저 세상으로 가며 마지막 말을 남기셨다."동생을 잘 키우라"는 말씀이셨고, 난 엄마에게 동생을 잘 보살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열심히 해서 꼭 최고가 되겠다"는 다짐을 또 하고 또했다.
아직도 엄마를 생각하면 가슴에 한이 맺힌다. 조금만 더 기다리셨으면 내가 정말 잘하는 모습을 보여드릴수 있었을텐데,,
가족들한테 정말 잘 할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나서 난 더욱 열심히 연습에 집중했다.
진영이 형은 하나하나 직접 가르쳐 주는게 아니라 방법을 가르쳐 줬다. 우리 사무실에선 안무를 위해 솔12동작, 스텝9동작이 담긴 테이프를 제작했고, 난 그 테이프를 보면서 지겹도록 연습했다.
진영이 형은 바쁘지 않을 땐 일요일마다 연습실에 와서 내 춤을 보며 지도했다. 그런데 잘 한다는 말씀은 한마디도 안하셨다. 요즘엔 "멋있다.잘한다"는 말씀을 자주하시지만 그땐 맨날 "어떻게 너 같은 애가 춤을 추냐, 도저히 안되겠다"며 기를 죽였다. 그게 진영이 형의 교육방식이었다.
진영이 형이 미국에서의 음악작업때문에 날 가르치지 못할때는 고독과의 싸움을 벌여야 했다. 연습실에 혼자 늦게까지 남아 안무를 짜고 연습을 했는데, 이땐 정말 외로웠고 우울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방법은 지하철,버스안에서 춤,노래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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